생애

1866년 서퍽에서 나 1899년 중국으로, 쫓기듯 돌아왔다 1909년 다시 건너가 1930년 라성탑에 묻히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람

마가렛 바버는 1866년 영국 서퍽주 피즌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루이스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마사(본성 깁스)였습니다.

예순셋에 주님께서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그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그는 두 번 중국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두 번 다 집을 버리고 수천 마일을 홀로 건너갔습니다.

첫 번째 중국 — 1899년

1899년 그는 복건성 복주로 보내져, 영국 국교회가 세워 운영하던 도수여자고등학교에서 일곱 해 동안 가르쳤습니다.

그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넘쳐 나오자 많은 학생이 그에게 끌려 그의 가르침을 원했습니다. 교장이 그것을 시기했습니다. 교장은 그에게 열 가지 부당한 혐의를 씌웠습니다.

조사를 받으면서 그가 주님 앞에서 느낀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엄지가 새끼손가락과 다투면 상하는 것은 머리뿐이다. 그는 온전히 순종하여 조용히 학교를 떠났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죄목을 적은 문서가 영국 선교부 본부로 보내졌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그늘 아래 잠잠히 있기를 배웠습니다. 자기를 변호하기보다 오해를 받는 편을 택한 것입니다. 영국으로 돌아가서도 계속 입을 다물었고, 선교부의 책임 형제가 권위로 명하여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숨기지 말고 말하라고 하고서야 입을 열었습니다.

영국에서의 두 해

영국으로 돌아온 뒤 그는 그리스도인 잡지 『새벽』(The Dawn)을 펴내던 팬튼(D. M. Panton) 형제를 만나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팬튼은 교파의 문제에 분명했고 성경의 예언과 이기는 것에 관한 진리를 알았습니다. 그의 영향으로 바버 자매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영국에 머문 두 해 동안 그는 믿음을 행사하며 중국으로 돌아가 일할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두 번째 중국 — 1909년

마침내 1909년, 팬튼과 그가 섬기던 노리치의 서리 채플의 교통을 받아 그는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번에는 뒤를 받쳐 주는 큰 선교부가 없었습니다. 스무 살 아래인 조카 발로드(Ballord) 양이 함께 갔는데, 조카에게는 얼마간의 저축이 있었지만 바버 자매에게는 시편 23편의 주님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그는 주님께서 필요를 채우시고 갈 곳으로 이끄시리라 믿었습니다.

배가 민강을 건널 때 그는 조용히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라성탑(Pagoda Anchorage)의 경치가 눈에 들어왔을 때, 그는 이곳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자리라고 느꼈습니다.

라성탑

그는 라성탑에 집을 얻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 살았습니다. 집주인은 고아원을 맡고 있던 시아 자매였습니다.

바닷가의 외진 곳이었고 집은 소박했습니다.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살던 좋은 집과는 딴판이었습니다. 복주에서 그 집에 가려면 기선을 타고 마미로, 다시 작은 배로 가까운 마을로, 거기서 언덕길을 걸어 낡은 나무집들에 이르러야 했습니다. 그중 한 채에 그의 침실이 있었고 나머지는 손님을 맞는 데 썼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이 그랬듯 라성탑은 그에게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참고 견딤

그 땅이 늘 평안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압력에 온전히 낙심하여 소망이 없던 날도 있었는데, 그때 주님께서 그와 함께 서서 힘을 주셨습니다. 그 경험에서 나온 시가 찬송 662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번화한 산성 회진을 떠나 낯선 라성탑으로 옮겨 온 그는 외롭고 조용한 생활을 했습니다. 같은 마음을 품은 이가 없었고 동정하는 이도 없었습니다. 재정의 뒷받침 없이 주님만 의지했습니다.

복주에 살던 서양 선교사들 사이에 바버 자매가 라성탑에서 궁핍하게 지내며 먹을 것과 입을 것도 넉넉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한 자매가 사실을 확인하러 찾아갔을 때, 바버 자매는 강아지에게 빵과 우유를 먹이고 있었습니다. 찾아온 자매는 소문이 거짓이며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주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바버 자매는 듣고 웃으며 주님께 감사한다고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재정의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치러야 할 청구서가 있는데 주머니가 빈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자유주의자가 돈을 돕겠다고 왔습니다. 하나님을 두고 미신에 빠지지 말라고 하던 사람이었으므로 그는 도움을 거절했습니다. 절실히 필요했지만 주님을 신실하게 의지했고, 주님께서 채우셨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그는 믿음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아플 때 의사를 찾지 않았고 약도 주사도 쓰지 않았습니다.

1930년 2월 끝 무렵 장염에 걸렸습니다. 사촌인 리 자매도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열이 높아 한방을 쓰던 무서 리 자매에게 주물러 달라고 했고, 열이 내리자 동역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가며 기도했습니다.

쩌우 자매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에 어찌 우리만 위해 기도하느냐고 묻자, 그는 동역자들이 늘 마음에 있어 짐이 되므로 기도한다고 답했습니다.

며칠 앓다가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떠나기 전에 생명, 생명 하고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1930년 3월 1일이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 그에게 몇백 달러가 있었는데 장례 비용을 치르고 열두 달러쯤 남았습니다. 그는 참으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둔 사람이었습니다.

부고를 들은 많은 동역자가 부모를 잃은 듯 울었습니다. 한 형제는 자기를 사랑하고 바로잡아 주던 영적 어머니에게 이제 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들의 슬픔은 이 일이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편지를 받고서야 가라앉았습니다.

그는 라성탑 산 위의 외국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왕란주 형제를 비롯한 몇 형제가 집에서 묘지까지 관을 메었습니다. 묘비에는 바버 자매가 쉬는 곳이라고 새겼습니다.

장례에서 한 형제가 마가복음 14장 8절을 들어, 마리아처럼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쪽은 mebarber.ccws.org — The Story 의 내용을 한국어로 정리한 것입니다. 시와 증언의 전문은 그곳에서 영어로 보실 수 있습니다. © Christian Websites.